2 독일의 민간사회복지기관의 역할과 운영
독일을 비롯한 서양 사회의 사회복지 형성은 이웃사랑 실천을 중요한 계명으로 여기는 그리스도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인적 차원의 애덕 실천과 함께 교회 공동체가 신앙적 소명을 보다 더 충실히 살아가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직적인 접근을 하기 위한 공동체 차원의 방법론적인 고민은 이미 초기 교회 공동체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 그리고 대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 또한 교회 공동체가 이웃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보다 더 양적·질적으로 훌륭히 체계를 잡고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대해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보다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교회역사학자인 아돌프 폰 할낙(Adolf von Harnack)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병들고 고통에 처한 이들을 섬기는 사랑을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중심에 놓으셨고,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제자들의 영(靈)을 사로잡으셨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런 사랑의 의무를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하였으며,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갔다. 가톨릭 교회는 초기 교회시대에 이미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이러한 활동은 유지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의 광범위한 토대 위에 머물고 있었으며, 자신의 성화(聖化)는 이러한 공동체의 신성한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Adolf von Harnack,1924: 147-148)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 안에서도 자선을 베푸는 행위의 중요성이 언급된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애덕실천은 도움을 받는 사회적 약자에게 일차적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이들의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중요한 기회로 여길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선행위를 독려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그렇다고 스콜라 시대에 교회의 애덕 실천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개인적 차원의 활동에만 머물렀다는 것은 아니다. 수도회를 중심으로 가족·친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시설들이 생겨났으며, 국가 주도적이기보다는 교회와 수도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Schiling, S. Zeller, 2010: 23).
그리스도교 선포의 중심인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대한 부르심은 19세기를 거쳐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다. 농업중심의 사회적 구조는 산업 중심의 성장과정을 통해 무너졌고, 영유아층부터 노년층에 걸쳐 많은 시민들이 건강과 사회적 결속력 그리고 교육과정과 관련된 작업환경의 착취적 구조로 인해 빈곤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빈곤은 극심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고, 국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게 된다. 사회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만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가톨릭과 개신교 교회에서도 새로운 자발적 참여와 이를 위한 업무와 시설들이 생겨나게 된다. 작업장(workhouse) 형식으로 영국에서 사회사업 활동이 발전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여기는 것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접근과 함께,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개신교회가 1848년부터 요한 힌리히 비션(Johann Hinrich Wichern)의 주도하에 이미 개신교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사업 관련 시설들을 중앙위원회 성격인 “Centralausschuss der Inneren Mission”-현재는 Diakonie(디아코니에)로 불린다- 산하로 모아들였다.
가톨릭 교회도 역시 19세기 초반부터 성 빈센트 드 폴 자비의 수녀회를 비롯한, 여러 수녀연합회를 중심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 내의 사회사업 활동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본당 신부들의 지지와 청원 안에서 많은 본당 공동체 차원에서 사회사업이 펼쳐졌으며, 고아원,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시설, 노인, 환자 등을 위한 시설들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내의 이런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수도회나 교회 사회사업을 위한 시설들 상호 간의 연계나 협력적 활동은 오랜 시간 동안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을 총괄하고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 또한 뒷받침 되지 못하였다. 이렇듯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이 개별 수도회나 시설별로 이루어지다 보니, 정치적으로도 그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을 위한 교회 조직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로렌츠 베르트만(Prälat Lorenz Wertmann, 1858-1921)의 주도하에 1897년 11월 9일 기존의 수도회와 본당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던 시설들을 연합회 성격인“Charitasverband für das katholische Deutschland”-약칭으로 Caritas(카리타스)로 부름- 설립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은 민주제 연방국가 형태를 지녔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개혁을 단행하여 여러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기가 독일 사회복지, 특히 민간사회복지시설에 주는 의미가 특별하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137조 3항에는 종교기관에 대한 고유성과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내용이 명시된다(Artikel 137 Abs. 3 WRV). 종교기관에 대한 고유성과 자치성은 종교의 자유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활동에 있어 그들의 고유한 활동에 대해 인정을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항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조성은 본래 ‘예비’또는 ‘보조’를 뜻하는 라틴어 sbusidium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로마 시대의 군사 용어로써 전방에서 싸우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후방의 예비 부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개념이 사회생활에 적용되어, 더 큰 사회단체가 더 작은 사회단체를 위해 보충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해 도움의 자세를 지녀야 하고, 사회 중간 단체들이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다른 상위 단체들로부터 부당하게 양도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사회학적으로 사용된 것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가톨릭 교회의 최초의 사회 문헌인 회칙인 『새로운 사태』반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칙 『사십주년』을 통해서이다. 당시 공산주의의 팽창과 우익 독재의 등장으로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확대되었고, 정치적 독재에 대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이러한 원리가 강조되었다. 결국 국가주의(nationalism)나 전체주의(totalism) 같은 사상 안에서 개인이나 소집단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원리인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러한 보조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종교기관의 활동을 보장해 주고자 하였으며, 이는 오랜 전통 안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조직적인 개입을 위해 설립된 종교 사회복지기관의 고유한 활동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헌법이 제정되기까지 디아코니에와 카리타스 협회의 정책 제안 활동이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비록 나치정권 하에서 이러한 보조성의 원리를 실현할 수는 없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그대로 계승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사업법의 역할을 하는 사회법(Sozialgesetzbuch) 곳곳에는 이러한 보조성의 원리가 직·간접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보조성의 원리는 독일 사회복지기관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민간사회복지연방협회(Bundesarbeitsgemeinschaft‘민간사회복지연방협회 der Freien Wohlfahrtspflege(BAGFW)’의 창립과 활동을 보장해 주는 정부와의 협력적 관계 안에서 잘 나타난다. BAGFW의 역사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살펴본 개신교와 가톨릭 사회복지시설연합회를 중심으로 정부와의 협력적 관계를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민간사회복지연합(Deutschen Liga der Freien Wohlfahrtsverbänd)’회가 설립된다. 이 협회에는 독일 민간사회복지를 대표하는 6개의 법인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독일 내의 민간사회복지시설 및 단체들은 이 6개의 대표 법인에 극소수의 일부시설을 제외하고 모두 소속되어 있다. 6개의 법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rbeiterwohlfahrt(AWO) 노동자복지협회
-Deutscher Caritasverband(DCV) 독일 카리타스협회(가톨릭)
-Der Paritätische Gesamtverband(DPWV) 단체협회(비종교 및 사단법인중심)
-Diakonisches Werk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DW) 독일 개신교회 디아코니 회
-Deutsches Rotes Kreuz(DRK) 독일 적십자
-Zentralwohlfahrtsstelle der Juden in Deutschland(ZWST) 독일 유대인복지위원회
1923년 독일 민간사회복지연합이 출범할 당시에는 Der Paritätische Gesamtverband는 설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협회가 설립되어 기존의 5개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회복지기관들의 대표성을 지니고 BAGFW의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나치 독일(1933-1945)의 시기 동안 독일 민간사회복지연합회와 산하 시설들은 나치 정권의 간섭과 통제하에 놓여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재개할 수 있었다. 아울러 정부의 사회복지정책을 반영하여 직접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신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받아 정부와 사회복지 분야에서 협력적 동반자로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