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종사자 보수교육의 전반적인 점검과 진단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책
1.사회복지사와 사회복지기관의 사명과 보수교육의 필요성
김성우(가톨릭사회복지연구소 소장)
Ⅰ. 들어가는 말
사회복지시설의 가파른 양적 팽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복지 영역은 빠르게 성장해 나갔으며, 2008년 이후 도입된 장기요양보험의 도입으로 인해, 노인요양 복지시설과 주간보호시설 등이 2010년 이후 사회복지시설의 증가를 주도하고 있다. 또한 1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국가가 관리하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복지(福地)’라는 단어가 혼합되어 다양한 자격증과 관련 업종 등이 등장하고 있다. 복지 범람(福地汎濫)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복지’라는 단어를 품고 있는 전통적인 사회복지기관과 사회복지기관의 종사자들에 대한 고유한 역할과 그들의 정체성과 전문성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급변하는 한국사회복지서비스의 현장에 적응하고, 공공영역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 전달체계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고민과 연구의 필요성은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본 소고(小考)에서는 사회복지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종교계를 비롯한 민간사회복지기관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복지기관들의 고유한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사회복지기관들의 기능과 이러한 기관들에서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전문적 역할과 원활한 역할수행을 위한 보수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역사 속에 드러나는 민간사회복지시설·기관의 역할
소위 ‘사회적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주도의 공적 제도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류는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만으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료 구성원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원조 활동을 실행해 왔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사회보험과 사회보장법을 중심으로 공적전달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접근과 민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조직적이고 공동체적인 접근은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발전한다. 방대한 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한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한국 사회복지의 태동과 민간사회복지기관의 활동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삼국시대부터 민생구휼(民生救恤)을 위한 국가의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국가 정책으로의 접근뿐만이 아니라, 전통사회 안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들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농경사회 안에서 춘궁기를 극복하기 위한 위민(爲民) 정책은 당시 민본사상의 핵심으로 간주되었고, 성군(聖君)이 되기 위한 기준이기도 했다(박병현, 2016: 331).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선 행위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불교의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장려되었다. 연기(緣起)와 윤회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 사상 안에서 자선과 선행을 통해 복을 쌓고 다음 생을 기약하는 복전(福田)사상이나 공덕(功德) 사상을 바탕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교도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왔다. 또한 사찰들은 단순한 종교기관의 성격을 넘어, 오늘날 형태의 복지기관으로서의 기능 또한 지니고 있었다. 고아를 받아들이고 무료급식소 형태의 자선행위와 의료행위들이 수많은 사찰에서 이루어졌다(감정기 외, 2011: 362).
불교의 자선에 대한 사상은 보(寶)라는 형식을 통해 조선시대 중기까지 제도화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불교도들이 기부한 기금을 바탕으로, 그 이자를 활용하는 형태였으나, 고리대 성격이 짙어지면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학사업과 빈민구제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의 기금(fund) 형태의 제도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감정기 외, 2011: 363).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에 따른 양반과 지배층이 주도한 향약은 주민교화와 풍교 확립을 위한 조직체였다. 향약의 4대 자치 규약 중에 하나인 환난상휼(患難相恤)에 의거하여 오늘날 회원으로 볼 수 있는 약인(約人)들이 수화(水火), 도적(盜賊), 질병(疾病) 등과 같은 일곱 가지 사고 또는 위험을 당했을 경우, 향약으로부터 물질의 제공이나 노동력의 제공을 보장받는 호혜성에 바탕을 둔 보험원리에 입각한 제도가 존재하였다. 물론 유교이념을 강제하고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양반과 지배층의 숨은 의도도 이면에 있었지만, 공식적인 목표는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화 민성 속(化民成俗)의 사상을 표방하였다(감정기 외, 2011: 366-367).
한불 수호조약(1886)을 시작으로 조선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호가 열린 조선에 특히 서양의 구교(舊敎)와 신교(新敎) 구분 없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되면서 사회복지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이미 한불 수호조약 이전에 조선에 입국해서 활동을 하던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 1854년 서울에 ‘영해회’라는 고아원이 설립된다. 영해 회의 운영은 고아들을 단순히 공동생활형태의 거주시설에 모아놓고 지냈던 형식만은 아니었다. 천주교 교인들 중에 위탁가정을 지원받아, 영유아기를 위탁가정에서 지내게 하고, 대략 아동기에 접어들면 영해회 본관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심흥보, 2001: 42). 또한 1885년도에는 역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20여 명의 노인들을 모시고 오늘날 형태의 양로원을 서울 종로 인근에 설립하기도 하였다(양인성, 2011: 128).
불교의 사찰이 마치 오늘날의 사회복지기관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처럼, 조선말기에 국내에 진출한 그리스도교 종교기관들은 단순한 종교집회를 위한 기능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교육, 의료, 아동, 여성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복지활동 거점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강대국들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교육을 통한 국민의식의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천주교 통계에 따르면 1893년 당시 천주교가 경영하는 학교는 총 36개교, 학생수 246명이었으나, 1904년에는 75개교 693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 육기 관인 배재학당이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되었고, 북감리교 여성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에 의해 이화학당과 북장로회파의 초대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경신학교가 1886년에 설립되기도 하였다(심흥보, 2001: 61-62). 이러한 교육복지에 대한 활동은 이후 일제 강점기 속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1915년 8월 일제는 소위 ‘포교 규칙’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총독부의 허가 없이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약되었다. 또한 종교시설들 역시 총독부의 간섭에 시달렸으며, 지역사회의 거점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종교시설들의 활발한 기능은 저하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복지의 전개는 몇 시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시기마다 민간사회복지기관들의 역할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전쟁 고아와 미망인 등, 요보호 중심의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시설의 급증은 국가 제도적 뒷받침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시설보호 중심의 민간 구호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이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시설들은 해외 원조기관들에 의해 직접 운영되거나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수용보호시설의 경우 1948년에 127개의 시설에서 1959년에는 691개 시설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이 중에서 영육아시설수는 전체 약 67%에 달하는 467개소였다(하상락, 1989: 88-92). 이는 한국전쟁 이후 발생하는 전쟁고아와 가정형 편의 어려움으로 인해 시설에 위탁 보호되어 양육되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전후 한국으로 지원된 외국민간 원조단체의 원조액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기는 어려우나, 아래의 표에서 나타나듯이 1958년부터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예산액과 외국 민간 원조단체의 외원액을 비교해보면 1958년 전체 보사부 예산의 36.2%를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사회복지의 주요 자금 원천이 해외원조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백종만, 1996:44).
<표 1> 외국민간원조단체의 외원액
년도 | 58 | 59 | 60 | 61 | 62 | 63 | 64 | 65 |
비율 | 36.2 | 27.9 | 61.6 | 216.3 | 106.2 | 124.7 | 201.0 | 165.9 |
년도 | 66 | 67 | 68 | 69 | 70 | 71 | 72 | 73 |
비율 | 119.6 | 76.5 | 43.9 | 65.8 | 105.7 | 72.2 | 99.9 | 109.9 |
년도 | 74 | 75 | 80 | 81 | 82 | 83 | 84 | 85 |
비율 | 145.6 | 34.7 | 14.6 | 15.8 | 12.7 | 10.3 | 10.1 | 6.4 |
가톨릭 구제 위원회(C.R.S: Catholic Relief Service)는 이러한 해외원조기구 중에서도 대표적인 기구이다. 1947년부터 1963년 사이에 가톨릭 구제 위원회의 원조 총액은 140만 달러 정도였으며, 1964년에만 약 350만 달러에 이르렀다. 또한 이 위원회의 혜택을 받은 사람을 대략 75-8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C.R.S는 주로 양곡 사업, 의료 사업, 지역 사회개발 사업 등의 후원을 주도하였으며,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계몽운동에도 관여한다.
이 시기의 사회복지는 요보호 중심의 응급구호 성격으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주거복지나 소득보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특히 시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복지는 민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국공립 시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1957년을 기준으로 양로시설은 민간에서만 운영하는 47개가 있었으며 영유아시설의 경우 민간이 472개소인데 반해, 국공립은 14개소에 지나지 않았다. 부녀 보호시설의 경우 민간운영이 26개소였으며, 국공립은 4개소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민간운영의 구성은 순수 국내 자본에 의존한 시설도 존재하였으나 해외원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복지단체와 종교 단체, 수도원 등의 활발한 활동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 여겨진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생활보호법’, ‘아동복리법’, ‘원호법’(1961)과 ‘군인연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의료보험법’,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1963) 등이 입법화되었지만, 이는 사회복지제도의 확보를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과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생활보호법의 경우 과거 조선 구호령의 내용을 답슴하는 수준이었으며, 의료보험법이 제정은 되었으나 사실상의 실행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행된 것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전 국민을 대상을 하는 연금제도가 아니라 군인, 공무원, 국가 유공자, 사립학교 교직원과 같은 특수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급여가 지급되는 정책을 선택하였다.
사회복지서비스의 전달체계 안에서, 외원기관의 역할도 1970년대를 전후하여 쇠퇴한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해외기관의 자발적 철수 결정과 1974년에 ‘외국 민간 원조단체에 관한 법률’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하면서 해외 기관의 활동에 대한 통제 강화 등으로 인한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감정기 외, 2011: 399).
직접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을 대상으로 아동보호중심의 시설들이 노인, 장애인 시설로 전환하도록 행정적 지도가 이루어졌으며, 시설보호 아동의 가정복귀, 입양, 위탁 등의 정책적 비중도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수용형 시설 중심의 사회복지기관이 다양화되고 이용시설이 증가되는 것은 1980년대 이후로 평가된다(감정기 외, 2011: 400).
사회복지기관의 본격적인 양적성장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사회복지서비스의 전달체계의 변화가 시작되고, 사회복지분야를 보다 세분화하고 전문화하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사회복지기관을 설립하고 비영리법인에 위탁하는 위·수탁 구조의 시설이 증가하였으며 예산과 사업 진행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도점검이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1998년 사회복지사업법의 개정으로 시작된 사회복지시설평가와 사회복지시설관리 안내 지침의 내용은 기존의 사회복지시설들의 사업성격과 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장기요양사업의 등장과 사회복지현장의 다양성으로 인해 사회복지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체들은 단순한 양적증가 뿐만이 아니라, 운영주체도 법인 중심에서 개인사업체와 비법인단체 등으로 다원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표 2> 사회복지서비스업 조직형태별 비교
산업별 | 조직형태별 | 1995 | 1997 | 1998 | 2000 | 2005 | 2010 | 2015 | 2016 | 2017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사업체수 (개) |
||
사회 복지 사업 |
계 | 10,566 | 16,090 | 17,113 | 21,575 | 20,151 | 46,799 | 65,092 | 69,041 | 71,561 |
개인사업체 | 6,341 | 10,164 | 9,881 | 12.286 | 9,906 | 29,080 | 41,187 | 43,510 | 44,551 | |
회사법인 | 43 | 51 | 59 | 4 | 35 | 285 | 470 | 526 | 560 | |
회사이외의 법인 | 2,500 | 3,045 | 2,669 | 3,607 | 4,983 | 6,536 | 10,308 | 11,430 | 11,341 | |
비법인단체 | 1,682 | 2,830 | 4,504 | 5,678 | 5,277 | 10,898 | 13,127 | 13,575 | 15,109 |
자료: 통계청 사업체 조사 중 사회복지서비스업 조직형태별 비교(1995~2017); (재인용) 최재성, 2019: 7
한국사회복지의 역사 안에서 (민간)사회복지기관에 대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주제에 비해 언급된 내용은 미비하지만 몇 가지 특징들을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종교의 영향이 사회복지에 미친 긍정적 영향이다. 사회복지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지역사회내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따라 신도들의 자발적 애덕 실천이 진행되어 왔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해외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의 사회복지시설의 형태들이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해외원조에 있어서도 종교적 배경을 지닌 해외원조단체들의 활동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국가 정부가 직접적인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부터 등장한 민간사회복지시설들 또한 한국사회복지 안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일 것이다.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대인서비스의 성격을 지닌 사회복지기관들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보다는 민간영역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필요로 하는 시설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자체의 위수탁 구조 속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시설평가와 지도점검 또한 한국 사회복지기관이 갖는 특성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2020년 보건복지통계연보에 따르면 사회복지시설 중에서 지자체가 설치 운영하는 시설은 모두 7,040개로 나타난다. 이중에서 지자체 직영 시설은 전체 10% 정도인 733개소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위탁시설이다. 위수탁 구조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3년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회복지시설평가와 지자체의 지도점검은 민간사회복지기관의 다양성과 유연성에 영향을 주는 부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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